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1848년 8월 19일에 파리에서 출생, 1894년 2월 21일에 46세의 젊은 나이로 파리 근교에 위치한 도시 젠빌리에(Gennevilliers)에서 사망하였다.
부유한 파리지앵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센느(Seine) 구역에 자리한 상업 재판소의 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1868년 법학 학사 과정을 마쳤다. 1870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전문적인 법조인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학업을 마친 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였던 시대 상황으로 사법계로 바로 나가지 못하고 1871년 3월까지 군역에 동원되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후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교수로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중심에 자리하였으나, 인상주의라는 미술의 새로운 기류에 우호적이었던 레옹 보나(Leon Bonnat)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카유보트는 보나의 스튜디오에서 회화를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하였으며, 1873년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였을 정도로 미술에 입문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예술적 성장을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카유보트가 에콜 드 보자르에서 수학하였던 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와 주세페 데 니티스(Giuseppe de Nittis)를 비롯한 아카데미 외부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해나갔다.
카유보트는 1876년 제 2회 인상주의 전시회(Exposition des peintres impressionnistes)에서 정식으로 화가로서 데뷔하였으며, 이 때 1875년에 제작한 '대패질하는 사람들 Raboteurs de parquet'을 포함한 작품 8점을 선보였다. '대패질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1875년에 개최된 살롱전(Le Salon)에도 출품된 바 있으나, 도시 사람들의 노동 장면을 이상화 없이 현실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일부 비평가들에게 '저속하고 천박하다'는 비난을 받고 거부되었다.
그러나 후대 미술사학자들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에 기반을 두고 이를 충실히 기록하였다는 지점에서 카유보트의 근대성(modernity)이 유발되는 것이라고 달리 평가하였다.
카유보트는 사실주의적 태도를 고수하였으나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반영한 화면을 창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동시대인의 눈으로 바라본 왜곡되지 않은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와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를 비롯한 앞선 사실주의 화가들과 예술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전개하였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기에 그의 작품에서 인상주의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리의 물기를 닦는 남자 Man dries his leg'처럼 실내에 자리한 인물을 그린 작품에서는 색채의 풍부한 사용이 돋보이면서도 대상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는 드가 식의 사실주의 기법이 드러난다.
한편, '아르장퇴유의 돛단배 Voiliers a Argenteuil'에서는 강물에 비친 돛단배의 잔상을 분할 필법과 파스텔 톤의 색채를 운용하여 가볍고 산뜻하게 묘사하고 있어, 한낮에 내리쬐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고자 하였던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화면과의 친연성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이처럼 카유보트의 작품에서는 동료 화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다채로운 기법의 활용이 두드러지지만, 그의 작품 전반을 규정 할 만한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기울어진 구도를 꼽을 수 있다.
대각선 구도의 활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일본 판화 혹은 사진 기법에 근거를 둔 것으로 판단된다.
카유보트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일본 판화를 탐닉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사진술에 관심이 있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사진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사진의 발달이 인상주의의 성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일반적인 미술사적 서술로 미루어보았을 때, 카유보트 역시 사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억측이 아닐 것이다.
1887년의 '비 내리는 파리 거리 Paris Street; Rainy Day'에서는 후경의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전복된 'V'자 구도와 대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으로부터 뒤로 뻗어져 나가는 대각선 구도가 사용되고 있기에 카유보트 특유의 기울어진 구도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기울어진 구도는 '비 내리는 파리 거리'에서처럼 눈높이 시점과 결합될 뿐만 아니라, '미호메닐 가의 집에 있는 화가의 젊은 동생 르네 The artist's younger brother Rene in the home on rue de Miromesnil'의 경우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와 결합되어 시내를 조망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카유보트는 1888년에 아르장퇴유 근교의 젠빌리에의 주택을 매입하여 파리를 떠나 그곳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젠빌리에로의 이주를 기점으로 작품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자신의 정원에서 폐울혈로 생을 달리하였다.
그는 우표 수집, 난초 재배, 요트 제작, 심지어 섬유 디자인을 포함하여 매우 열정적 인 취미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그림 Madame Boissière Knitting, 1877 및 Madame Caillebotte의 초상화, 1877, Caillebotte가 만든 패턴을 작업하고 있음). 그의 죽음 이후, 그는 저명한 우표 학자 명부에 새겨 져 있었고, 그의 형제 Martial과 함께 만든 컬렉션은 현재 대영 도서관에 있습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생전에는 화가보다는 미술 수집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사후 70년이 지나고 후대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특유의 대담한 시점 사용과 화면 구성 방식이 인정받기 시작하며 19세기의 근대성을 포착한 인상주의 화가로 재평가되었다. 새로운 회화적 주제인 도시인과 도시 노동자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였으며, 고전적 사실주의를 실험적인 인상주의와 결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화면을 창출하였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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